새벽이 끝난다. 로버트는 그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먼 하늘이 뿌옇게 젖어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천장에 거미처럼 붙은 카메라가 마치 인사라도 건네듯 붉은 빛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로버트는 카메라 렌즈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코니에 찬 바람이 계속 들이치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의 테이블 위에는 달력이 올려져 있었다. 로버트는 펜을 들고 숫자 위에 엑스표를 그렸다. 그는 달력을 한 장 뒤로 넘기고 날짜를 입안으로 셌다. 숫자가 열이 넘어가자 로버트는 그만두었다. 남은 날을 정확하게 세면 셀수록 까닭을 알 수 없이 그날 하루를 보내기가 고되었다. 로버트는 가운을 벗어 내려놓고 잘 다려진 새 셔츠와 바지를 찾아 입었다.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운 다음 넥타이를 매자 목덜미가 뻣뻣하게 긴장했다. 목이 꽉 조였지만 로버트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숨통이 더 트이는 것 같았다.

현관에는 늘 그렇듯 일정표가 도착해 있었다. 아침식사 8시. 메뉴는 베이컨과 양상추 샐러드 각각 4분의 1 접시, 잼 바른 토스트 두 쪽, 과일주스 한 컵. 점심은 오후 1시, 닭고기 시저 샐러드, 스파게티 한 접시, 레몬 조각을 띄운 물 한 컵. 저녁은 7시에, 양파 스프, 구운 새우를 곁들인 샐러드, 뉴욕 스트립 스테이크, 와인 한 잔, 초콜릿 케이크 작은 조각. 로버트는 굳이 종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외우고 있었다. 하루 일과는 언제나 똑같았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고 오후 2시부터 6시,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는 끊임없이 카메라 앞에서 말해야했다. 시계에서 종이 열두 번 치고 나서야 마법에서 풀려난 신데렐라처럼 입었던 옷을 벗고 침대로 돌아와 눕는 것이다.

로버트는 매일 비어있는 말을 쏟아내느라 목구멍에서 쓴물이 올라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그는 시키는대로 말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식재료가 냉장고에 채워졌고 로버트 피셔와 뉴욕은 하루치 목숨을 벌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친절을 베풀고 있었지만, 로버트는 그것이 매우 불쾌하고 무례하며 혹독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너그러움을 가장하여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흉포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로버트가 처음 카메라 앞에서 입을 다물자 그들은 즉시 그날로 잘린 손과 안구 다섯 쌍을 상아색 선물상자에 담아 아파트 안으로 밀어넣었다. 로버트는 그 다음날도 말하지 않았고 또다른 것을 받았다. 그중에는 로버트가 아는 손도 있었다. 로버트는 사흘째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린 손이나 뽑아낸 눈 따위가 아니라 잘린 목을 보낼 것임을 깨달았다. <보라! 로버트 피셔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열 명의 무고한 사람이 손과 눈을 잃었다. 이것은 그의 책임이다. 우리는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인데도 그는 거부했다. 로버트 피셔는 최소한의 희생을 거부했다.> 로버트는 그들이 무슨 말을 떠들고 있을지 상상했다. 삼일째 저녁 로버트가 카메라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을 때 피터 브라우닝의 뽑혀진 두 눈이 로버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로버트는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대부의 안광이 이따금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인삿말이었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나요. 꿈 없이 푹 주무셨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께서 우려의 뜻을 표하고 계시리라 짐작됩니다만 저는 오늘도 건강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조만간 여러분들이 집과 직장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갈 날 말입니다. 저들이 정부에 무엇을 요구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역시 모릅니다. 카메라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이 틀림없습니다만, 사실 저는 여러분이 정말로 저를 지켜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어떤 매체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하다못해 타블로이드지의 헤드라인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카메라 옆의 모니터 화면에서 대본이 느리게 올라간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제게 여러분의 안전에 대해 약속한 것을 성실하게 이행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저의 긍지나 자존심보다는 뉴욕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말로 시간을 채우다 이윽고 열시가 다가오자 로버트는 엄지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저의 지난 오만하고도 경솔한 행동으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이름은 샬럿 존스, 에밀리 피터슨, 마크 시몬스, 리처드 프랭크, ……”

로버트는 이 부분이 가장 끔찍했다.

“……피터 브라우닝.”

이것으로 끝이었다.

시계에서 비상 경보 소리처럼 알람이 울렸다.

넥타이를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끄르는데 카메라의 붉은 점이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로버트 피셔는 대중에게 노출되는 삶이 익숙한(혹은 익숙해져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로버트는 그저 지쳐가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는 막연하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로버트는 눈꺼풀 위를 손가락로 거세게 문질렀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맨발에 매끄러운 시트가 스친다. 간밤에 잠이 퍽 잘 오긴 하셨는지? 빌어먹을 세상. 로버트는 턱이 부르르 떨려 손가락 두어 개를 잇새에 넣고 꽉 물었다.



*2012년 8월 초고를 수정해서 씀. 미완.

*브루스 웨인(배트맨) X 로버트 피셔(인셉션)


*150925 추가

이거 암만 봐도 영원히 완성 안 할 것 같으니 그냥 뒷얘기를 써두자면 삼부작 계획이었고 이 다음편에 브루스가 로버트를 구하러 짜잔 나타날 거였다. 막편은 로버트가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는 얘기. 제목은 <바람개비>

,